근황
태그: musing
이직
요즘 글을 못 쓴 이유가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큰 결정을 했고, 그에 따른 변화가 있었고,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마디로 바빴다….
하루아침에 이런 결심을 한 건 아니다. 꾸준히 여러가지를 해보고 있었고, 종종 시도도 했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양한 핑계거리를 찾았다. 가족들, 친구들, 지금 회사에서의 평가, 익숙한 프로젝트, 한국에서의 안정된 생활 등, 가지 않을 이유를 찾자면 끝도 없었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버렸고, 문득 도전할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이 꽤나 짧다는 걸 깨닫게 해준 여러 사건들도 있었다. 할 수 있을 때 해보고 싶었다.
물론 운도 따라줬다. 요즘 같은 시기에 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안다. 결정을 하고 보니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나도 그동안 나쁘지 않게 열심히 해왔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정말로 감사할 따름이다.
불확실
그렇게 큰 결심을 하고 옮겼지만 …어휴… 내 그릇의 크기를 여실히 깨닫기도 했다.
일단 내 선택의 영향이 더 이상 나 개인에서 끝나지 않게 되었다. 나의 선택으로 가족 전체의 미래가 불확실, 아니지 정확히는 불확실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니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대한 후회와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게임처럼 세이브 & 로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에겐 꽤 큰 스트레스였다. ‘왜 내가 굳이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냥 익숙한 환경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거 아닐까’, 등등, 다양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갉아먹었다. 사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그러다가 이런 글을 봤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면역체계는 분주히 움직여서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스스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나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미래의 스트레스 상황을 상상만 할 때는, 그런 면역체계가 작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사건의 충격을 과대하게 예측한다. … 심리 면역체계의 이런 탁월한 활동으로 인해 우리는 실연이라는 역경으로부터 예상 외로 빨리 벗어나게 된다. - <프레임>, 최인철프레임>
이 말대로, 아직 모르는 미래의 상황을 생각할 때는 그 충격과 영향을 과하게 평가하게 된다는 걸 체감했다. 정말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시간은 흘러가고, 배는 고프고, 아이는 자란다. 불확실에 떨면서 정신을 갉아먹느니 현재를 성실하게 보내는 게 낫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이거 정말 간단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말이구만. 아무튼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에 집중해보려고 했다. 폰을 내려놓고, 가든에 의자 펴고 앉아서,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와 하늘을 보면서, 커피 한잔 하는 걸 즐기게 되었다. 덕분에 아들이랑 밖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머릿 속이 정리되어 좋다. 게다가 내 선택을 응원해주는 가족들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불확실함을 해쳐나갈 위로가 된다. 그리고 과거에 당시에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래도 어찌저찌 잘 해쳐나갔던 기억도 잔뜩 있었다. 정신만 차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냥 하기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뭘 한 건 아니고 그냥 운이 좋았다. 그럼 이제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인가? 또 그렇지는 않을 거다. 언제나 인생은 문제 투성이일테고, 단지 그 중에서 어떤 문제를 선택할지의 문제다. 그리고 내가 풀기로 한 문제를 풀 뿐이다.
그런데 요즘 이게 정말 어려워졌다. 예전에도 오래 몰입하기 쉬운 편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정말 집중하기가 어렵다. 일단 손가락 하나 까딱 하면 쉽게 채워지는 도파민 덕분에 점차 자극에 무뎌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자사 제품이 된 릴스를 멀리 하려고 시야에서 폰을 치워버려야 그나마 뭔갈 시작해 볼 수 있다. 게다가 자꾸만 지능을 상품으로 만들어 화이트칼라의 명줄을 끊으려는 악명높은 두 CEO (이제는 셋인가?) 탓에 ‘이걸 해봐야 뭐하나…’ 하는 무력감과 회의감이 발목을 잡는 것도 영향이 크다. 게다가 거시적인 정치/경제/기후변화 등, 쏟아지는 정보에 주의를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일단 해서 빨리 실패를 해야, 다음 번에 뭘 할지 감이 잡힌다. 도파민에 대한 유혹이나 회의감이 스멀스멀 찾아오기 전에 그냥 빠르게 해야 한다.
싫어도 하기
게다가 거의 10년을 몸담고 있던 분야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메인에 적응하는 일은 꽤나 쉽지 않다. 멘탈 모델도 새로 쌓아야 하고 안그래도 전부 영어인데 모르는 단어나 줄임말들이 너무 많아서 한 문단을 세 번은 읽어야 겨우 기억에 남는다. 머릿 속에 큰 그림도 여러번 그렸다가 지웠다가 한다. 새카맣고 거대한 숲에서 작은 랜턴 하나만 들고 길을 찾는 기분이다. 막힐 때마다 싫은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한다. 다행히도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기여하는 일은 여전히 재밌다. 즐길 틈새를 찾아 파고들면 어느새 싫은 기분도 사라진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있다. 일단 잘 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다. 익숙한 분야라면 오랜 시간 쌓아둔 거대한 암묵지가 새로운 뾰족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테지만, 새로운 도메인에서는 그런 게 많지 않다. 이미 낡아버린 문서를 싫어도 읽어야 하고, 바보같은 질문도 주변에 마구 던지고, AI의 할루시네이션에 속아넘어가기도 하고, 맞지 않은 그림도 여러 번 그려가며 좌충우돌 해야 겨우 올바른 길을 찾는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싫어도 하는 것이다. 잘 할 필요도 없다. 그냥 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도 그래 왔다. 딱히 엄청나게 잘 한 것도 없이 그냥 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그냥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된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재미, 열정, 취미
여러가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해보니, 생각보다 내가 재밌게 즐기는 거리가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운동도 그다지 즐기지 않고, 영국에 와서 호기롭게 골프도 시작해봤지만 내 마음대로 안되는 몸뚱아리에 답답함만 늘어갔다. 그래도 종종 하고는 있지만. 요리는 좋아하는 메뉴만 가끔씩 하는 편이니 즐긴다고 하긴 어렵다. 한때는 기타를 잡아봤고 심지어 어릴 때는 부모님의 성화로 피아노, 바이올린, 단소 등 다양한 것을 해봤지만 지금까지 즐기는 건 딱히 없다. 그나마 한국에 있을 땐 노래방이라도 종종 갔는데. 학생 때는 미술을 제일 좋아하고 즐겼지만 지금 그리는 그림은 기껏해야 설계를 위한 다이어그램이 전부다. 아들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SNS에 종종 올리곤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즐긴다고 보긴 힘들고.
작년까지만 해도 그나마 취미 코딩을 하곤 했는데, AI가 프로그래밍의 가장 재밌는 부분을 느슨한 정확도로 상당히 잘 해내어 버리게 되면서 뭔가 열정을 빼앗긴 기분이 든다. 여전히 복잡한 실제 서비스를 설계하고 이해하는 일은 재밌지만, 이걸 취미로 삼기에는 산출물(?)이 애매하다.
생각보다 인생이 길게 남았는데, 내가 열정적으로 즐기는 게 생각보다 없다는 사실에 공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사실 이래도 괜찮다고 생각은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변 친구들이 뭔가에 열정적으로 푹 빠져 있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궁금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일단은 도메인을 넓히는 것부터 시작해보고 있다. 평소라면 절대 안읽을 책도 읽고 있고, 학부 필수 과목이었지만 제대로 깊게 공부하진 못해 늘 아쉬움이 남았던 통계학 책도 다시 펼쳐보고 있다. 스도쿠 같은 퍼즐을 풀어보다가 어쩌다보니 지금은 체스 퍼즐을 시간 날 때 풀어보고 있는데 이것도 새로운 재미다. 취미 코딩은 AI 없이 유기농으로 시도해볼지, 아니면 AI를 전면적으로 등에 업고 (업힌다고 해야할지..) 시도를 해볼지 고민 중인데, 회사에서 써보니 이게 제대로 끝까지 써보려면 한두푼 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유기농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그나마 글을 쓰는 취미는 아주 느슨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이것도 AI한테 열정을 빼앗겨 버린 부분이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유기농의 매력은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이 블로그는 공개된 잡설+일기에 가깝고 MAU(라고 부르기도 민망한..)도 하찮아서 사실상 나만 보는 공간에 가까우니, 내 글의 독자는 미래의 나라는 생각으로 쓴다. 아마 앞으로도 온갖 이상한 주제의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