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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의료 경험

2024-09-01

태그: life essay

아주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되어서 글로 기록해본다.

발단

감사하게도 회사에서 좋은 기회로 영국에 2년간 주재원으로 가게 되었다. 원래는 올해 건강검진을 일반검진으로 받을 예정이었는데, 주재원은 종합검진이 필수라서 종합검진으로 받게 되었다. 회사 종합검진에는 기본 항목 외에 추가 검사 패키지 두 개를 선택할 수 있는데, 특별한 항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간호사 분에게 주재원들이 자주 받는 항목을 추천해달라고 하였고 저선량 폐 MDCT를 찍었다. 그렇게 7월 말, 부신에 종양을 발견했다.

전개

생전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소견이었기에 검색도 해보고 의사들 유튜브도 찾아봤다. 부신은 호르몬과 관계있는 장기이고, 부신에 생기는 종양은 폐 CT처럼 다른 검사를 통해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서 “부신 우연종”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약 3/4 정도는 아무런 증상이 없는 양성(Benign) 종양이고 나머지 1/4은 호르몬의 이상으로 인해서 고혈압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비록 고지혈증 소견은 있지만 고혈압은 커녕 오히려 갈 때마다 저혈압을 의심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종양은 발견되었지만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 판단내렸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공유했고, 찾아보니 심각한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소견 결과를 들고 내분비과에 외래를 보았다. 거기서 내분비과 의사선생님은, CT 상 위치가 부신이 아닐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시간이 촉박하니 부신 종양일 경우의 검사와 아닐 경우의 검사를 한번에 하자고 하셨다. 부신 종양이면 (증상이 없더라도) 호르몬에 이상이 있을 수 있으니 호르몬 검사를 해야 하고, 부신 종양이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확한 복부 CT를 찍어야 한다. 다행히 외래를 본 바로 다음 날 오전에 CT 한 자리가 취소된 게 나와서 정말 운 좋게도 곧바로 두 검사를 모두 진행할 수 있었다.

CT를 찍고 약 일주일 뒤 외래에서 충격적인 두 가지 소식을 접했다.

  1. 부신 종양은 걱정한대로 부신 종양이 아니었다. 위치가 횡격막과 부신 사이에 있고 크기가 꽤 컸다(3.5cm).
  2. 뜬금없게도 위와 췌장 사이에 종양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이것도 역시 크기가 꽤 컸다(4cm).

며칠만에 막연히 증상없는 양성 부신 종양일 거라는 스스로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종양 두 개가 발견되어 버린 것이다. 둘 다 크기가 커서 떼어내는게 좋다는 소견과 함께 곧바로 외과 외래를 잡게 되었다. 종양이라니. 그것도 두 개라니. 그것도 둘 다 크기가 크다니. 심지어 췌장은 위험한 위치라고 들었는데. 온갖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은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며,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두 종양 모두 모양이 예뻐서(?) 악성, 즉 암일 가능성은 낮아보인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재활의학과 친구에게 시간날 때마다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 친구도 암은 전문이 아닐텐데,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귀찮게 만들었는데도 잘 설명해줘서 고마웠다.

아무튼 그렇게 강북삼성병원에서 로봇 수술로 유명하다는 갑상선암 쪽 교수님에게 외래를 가게 되었다. 내분비과 선생님은 외래를 잡아주시면서, 아마도 많은 일정이 밀려있어서 제거 수술은 10월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하셨다. 당장 주재원 출국 일정은 8월인데. 그러면 10월에 혼자서라도 잠깐 들어와서 제거 수술을 받고 가야하나? 수술 받고 나면 회복을 위해서 입원해야 하는 기간도 있을텐데 그럼 최소 2주는 연차를 써야하나? 암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했던 걱정이 해야 하는 숙제들로 바뀌면서 조금 씩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갑상선암 교수님에게 외래를 봤더니, 위치가 자기가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니고 더 잘하는 로봇 수술 전문 교수가 있기 때문에 그 분에게 받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소화기암센터의 위/췌장암 로봇 수술 전문가인 김기윤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여러모로 김기윤 교수님과의 첫 외래에서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기록하자면: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종양 두 개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절정

목요일에 입원했다. 와이프는 아들을 돌봐야해서 어쩔 수 없이 지방에서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좀 죄송스럽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만약 우리 아들한테 같을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나도 당연히 이럴 것 같아서 받아들였다.

입원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갔다. 각종 놀 것들과 퇴원할 때 입을 옷가지들. 마지막 만찬으로 라면을 때리고 병실에 들어갔다.

입원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수술과 이후 회복에 쓰일 수액을 맞기 위한 대바늘로 정맥 링겔을 꽂았는데 주삿바늘이 커서 그런지 한참 동안 욱씬거렸다 (실제로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아직 상처가 남아있다). 그리고 다음 날 수술 시에 정확한 혈관 위치를 알기 위해서 혈관 조영제를 맞고 복부 CT를 한번 더 찍었다. 첫 번째 CT 촬영 때는 부신 조영제를 넣었는데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혈관 조영제는 확실히 주삿바늘로부터 뭔가 뜨거운 액체가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했다. 그래도 다행히 별 이상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정확한 수술 시간은 수술 당일 아침에 알 수 있었다. 찾아보니 로봇 수술에 쓰이는 다빈치라는 기계가 엄청 비싸기도 한데, 한 번 수술하고 나면 다음 수술을 위한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당일에 있는 다른 로봇 수술 스케쥴이 취소되면 내가 첫 수술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 수술이 끝난 후 두 번째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두 번째 수술로 확정되었고 11시 쯤 들어가게 되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 환자들을 태워가는 침상에 누워서 간호사분이 수술실 앞으로 데려다 주셨다. 수술실 안에는 또 대기 장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거의 한시간을 대기하였다. 내 수술을 함께 해주실 마취과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이러이러해서 죽을 수 있다, 이러이러해서 영구적인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 이러이러해서 저럴 수 있다와 같은 무서운 경고들을 들었는데 모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라서 그냥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12시가 다 되어서 진짜 수술실에 입장했다.

수술실에서 비로소 내가 어떻게 다뤄질지(?)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대바늘에 꽂은 정맥 주사랑은 별도로 두 개의 동맥 주사를 더 꽂아서 수술 도중에 일어날 지도 모르는 동맥의 문제를 모니터링할 예정인데, 이게 마취가 깨고 나서도 한동안 아플거라고 했는데 과연 퇴원하고 나서도 한참을 욱씬거렸다. 그 외에 혈압을 재기 위한 혈압계도 달았다. 그리고 ‘마취약 들어갑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기억이 끊겼다.

갑자기 왼쪽 배가 엄청나게 아프면서 숨이 잘 안쉬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깨어났다. 심호흡하라는 간호사분의 말에 ‘숨이 잘 안쉬어져요’라고 겨우 대답하면서 수술용 침상에 탄 채로 입원실로 이동했다. 곧바로 무통주사를 맞으면서 조금씩 호흡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주치의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다음날 무려 자차를 운전해서 퇴원할 수 있을거라던 의사의 말과는 다르게, 무통주사를 맞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생경한 아픔이 지속적으로 느껴졌다. 무통주사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10분마다 용량을 추가로 맞을 수 있었고 그 이상은 맞을 수 없었는데, 무통주사가 바로 그 악명높은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아파서 계속 딸깍거리며 버튼을 눌러댔다. 첫 날은 수술이 끝나고 거의 바로 소등 시간이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채 펜타닐에 취해 몽롱한 채로 하루가 흘러갔다.

원래 퇴원할 거라고 얘기했던(…) 수술 다음날인 토요일은 더 정신없이 흘러갔다. 펜타닐이 정말 무서운 약이라는 걸 느꼈는데, 통증은 확실히 조절됐지만 계속 몽롱하고, 뭔가 내가 내 의식을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다. 또 지나가다 거울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이 へ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등 뒤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 무통을 맞는데도 아픈게 가라앉는 것 같지 않아서 무통을 하루 더 연장했다. 이 시점에서 빠른 퇴원은 무리라고 판단해서 최대한 회복하고 퇴원하기로 했다. 마음 속으로는 그래도 잘 회복하면 이삿짐 빼는 날 오전에는 퇴원해서 이삿짐 빼는 현장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이 육체적으로는 가장 힘들었다. 밤새 수술 부위에서 등 쪽까지 가는 길에 있는 내장들이 불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종양으로 가는 길에 있던 내장들을 옮겼다가 원위치 한 탓인지, 아니면 제거했다던 고름 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10분마다 무통 주사 버튼을 누르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래도 일요일 점심 때 즈음이 되니 조금 씩 통증이 가라앉았고 일요일 오후에는 확실히 괜찮아졌다. 그래서 몽롱한 의식을 버리고 빠른 회복을 하기 위해서 두 번째 무통 주사는 다 맞지 않고 중간에 끊을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도뇨 카테터를 토요일에 뺐다가 자의로 소변을 볼 수 없어서 다시 꽂아야 했던 일이었다. 찾아보니 펜타닐의 후유증 중 하나가 소변과 관련된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3시간이 넘도록 소변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맨 정신에 도뇨 카테터를 다시 꽂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말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살면서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농담처럼 써왔지만 이 경험은 며칠은 환각통이 남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깊게 뭔가를 남긴 것 같다. 무통 주사를 일찍 끊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생경했던 느낌이 떠올라서 너무 싫다.

낮은 농도의 펜타닐이 섞인 무통 주사를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만 맞다가 끊었는데도 그 후유증은 이틀은 더 간 것 같다. 특히 정신이 몽롱한 그 느낌이 오래갔다. 그리고 무통을 맞는 동안에는 눈을 감으면 곧바로 잠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짧게 짧게 잠 든 적도 많았는데, 내 의지랑 전혀 상관없이 의식이 끊긴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런 펜타닐을 더 높은 농도로, 마약적인 목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인생을 송두리 째 날려버릴 게 분명해서 섬짓해졌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 씩 회복하면서 낮에 깨어 있는 동안에는 회복을 위해 어떻게든 걷고, 먹고, 유튜브를 보면서 놀았다. 하지만 밤에 잘 때는 힘들었다. 카테터 때문에 어떤 자세를 해도 불편하기도 했고, 무통 주사의 효과가 사라지니 확실히 어느 부위를 짼 건지(?)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새벽에도 간호사님을 호출하면서 진통제를 맞으며 잠들었다. 덕분에 잠을 잘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그렇게 수술 다음날 자차 운전으로 퇴원 가능할 거라던 예상과는 다르게 결국 나는 목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총 6일을 입원하였다. 내 회복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요즘 항간에 떠도는 말인 ‘대학병원이 환자를 강하게 키운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무사히 퇴원해서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퇴원 당일에는 농양 배액을 위해 꽂아둔 카테터를 뽑았는데, 뽑고 난 구멍을 실로 꼬매는 것이 아니라 스테이플러로 그냥 찍어버리더라… 아무리 “의료용” 이라는 접두사가 붙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묘했다. 생각해보니 수술에 사용된(?) 구멍의 상처들도 실로 꿰맨 것이 아니라 (역시 “의료용”) 본드로 붙여놨다고 설명 들었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의 몸이 튼튼한가보다.

결말

총 병원비는 약 1300만원이라는 금액이 나왔다. 로봇 수술은 비급여라서 건강 보험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들어놓은 실비 보험과 회사에서 약간 지원되는 의료비 덕분에 금전적인 부담은 덜 수 있었다.

배에 뚫린 구멍 다섯 개는 제각각의 속도로 아물고 있다. 그 중 배꼽 주변에 있는 상처가 있는데, 이 친구는 첫 외래에서 무려 “지방” 때문에 물이 새어나와서 가장 덜 아물고 있다는 소견을 받았다. 살을 빼야하는 많고 많은 이유에 또 하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다섯 상처 중 나름 상위권의 속도로 잘 아물고 있는 듯 하다.

조직검사 결과 다행히 종양은 두 개 모두 양성(Benign)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종양 모두 기관지성 낭종이라고 한다. 세포 분열로부터 태아가 발생하면서 기관지가 만들어질 때 기관지의 일부가 종양이 있던 곳 즉 위와 췌장 사이, 그리고 횡격막과 척추 사이로 잘못 뿌리내렸고 그 상태로 내가 자라면서 기관지에서 나오는 다양한 노폐물들이 쌓여서 종양이 생긴 것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인간의 몸이란 정말 신비롭다는 생각과 함께 현대 의학 및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왠지 내 오래된 지병인 비염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론적으로 21세기 한국의 높은 의료 수준을 체험할 수 있었다. 다양한 항목을 검사할 수 있는 건강검진부터, 빠른 검사 일정, 정확하고 훌륭한 수술, 친절하고 높은 수준의 의료진, 그리고 의료 수준과는 상관없지만 미리 들어둔 실비 보험 덕분까지. 찾아보니 로봇 수술이 한국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초반이라고 하는데, 당장 20년 전이었다면 이렇게 작은 절개로 종양을 제거하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도 19세기이니, 100년 전이었다면 수술을 받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종양을 미리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운이 따랐다. 운 좋게 주재원을 갈 기회를 잡았고, 주재원들이 하는 건강검진을 추천받아서 종양을 미리 발견했고, 어떻게 관련 일정이 잘 맞아서 출국 전에 무사히 제거할 수 있었다. 주재원의 기회부터 입원과 제거 수술까지, 그 과정에서 나를 도와주신 정말 많은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아무튼,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수술을 잘 마치고 무사히 영국에 입국해서 잘 회복하고 있다. 솔직히 두 번 겪고 싶진 않은 경험이었다. 앞으로 정말 이 악물고 건강 관리를 잘 해야 겠다. 오래 사는 것은 내 의지대로 안되더라도 건강하게 사는 것은 노력해볼 수 있지 않을까. 건강이 최고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