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M과 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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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게임에서 레이드 뛸 때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버프를 챙기는 일이었다. 직업마다 필요한 버프의 종류가 달랐고, 그 버프를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난이도도 달랐다. 뭐가 됐든 순서에 맞게 올바른 버프를 잘 쌓으면 캐릭터의 성능이 크게는 10배까지 뛰었다. 10x 엔지니어는 현실에 없지만, 10x 캐릭터는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었고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캐릭터는 스킬만 딸깍 하면 최대치의 버프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어떤 캐릭터는 특정 조건에서 순서에 맞게 꾸역꾸역 버프를 쌓아야 했고 그마저도 효율적이지 못하기도 했다. 어떤 버프는 특정 직업의 특정 스킬을 엄청나게 효율적으로 강화해주지만, 다른 직업에게는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어떤 버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살펴봐야 했다. 또, 버프는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내가 필요한 버프가 무엇인지 미리 계획을 짜두어야 했다. 일종의 공부가 필요했다. 그리고 디버프도 있었다. 보통은 적을 약하게 하거나 상대의 방어를 무력하게 만들어 나의 데미지를 더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예를 들어 특정 상황에서만 가능한 버프 또는 확률적으로 성공 가능한 버프가 실패하는 경우에는, 일종의 패널티 개념으로 다양한 종류의 디버프가 스스로에게 걸리기도 했다.
문득 LLM이 버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LLM 덕분에 지적 업무의 부하가 크게 줄었다. 21세기 직장인은 글을 읽고 쓰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런 측면에서 LLM은 글의 의미를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글을 다듬고, 메일의 톤을 적절하게 살려내는 등의 작업에서 강력한 버프가 된다. LLM은 또 코드와 관련된 작업도 가볍게 해준다. 코드도 역시 텍스트이고, LLM은 이걸 충분히 많이 학습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코드 베이스에서 익숙하지 않은 모듈의 의미를 이해하고,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코드를 짜고, 많이 알려진 언어의 많이 알려진 패턴을 적용하고, 이미 널리 알려진 알고리즘을 작성하는 등의 작업에서 강력한 버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갭이 생긴다.
LLM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뭔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LLM의 결과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LLM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파악해야만 한다. 얼마나 큰 덩어리의 일을 시킬 수 있는지, 추론 모델의 경우 어느 정도로 추상화된 프롬프트를 던져줘야 하는지 등을 파악해야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텍스트는 무한한 분야를 표현할 수 있고, LLM은 자신감 있게 틀린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어떤 개발자는 LLM이 뱉은 코드 한 줄을 보고 요구사항에 맞게 짠건지 아니면 지금 얘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빠르게 알 수 있지만, 다른 분야의 사람에게는 알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많은 연구에서 지적하듯이 현대 LLM의 본질은 텍스트를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습한 내용에 따른 편향(bias)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모델마다 독특한 편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모델은 코드를 좀더 보수적으로 작성하기도 하고, 특정 언어의 특정 프레임워크의 방법론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모델은 특정 정치 성향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잘못 가져다 쓰면 디버프가 걸리는 것이다. 은탄환(Silver Bullet)이 없는 것처럼, 은모델(?)도 없다.
결국 내 상황과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야 할 일이 뭔지 파악하고, 각 모델의 특징을 파악한 뒤에 LLM을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게임에서 순서대로 필요한 버프를 완벽하게 쌓아 올라 10배 이상의 데미지를 볼 수 있는 캐릭터처럼 엄청난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 반대로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잘 되길 바라면서 가져다 써버리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버프로 남거나 심지어는 틀린 대답으로 인한 디버프로 음의 생산성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여기서 양극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서 기회가 생길거라고 생각한다.
LLM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더욱더 중요해질 거라고 본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디지털 도파민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주의를 잃지 않고, 글을 깊게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명징하게 글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은 점점 희귀해질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이걸 의식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디버프에 걸린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