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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2025-10-20

태그: life essay

친구의 추천으로 장강명 작가님의 “먼저 온 미래”라는 책을 읽었다. 알파고의 등장은 바둑계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 이후에 바둑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특히 바둑기사들이 AI에 어떻게 적응하였는지를 취재하고, 거기에 작가의 생각을 흥미롭게 엮은 좋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책 제목을 영리하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강명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과거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취재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글이 논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어 참 읽기 쉬운 글을 쓰는 작가라고 느꼈다. 별 거 아닌 블로그 글을 쓰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물며 미래의 나에게도) 읽기 쉽게 쓰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절하게 깨닫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

책 자체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빨간 줄 치면서 읽었는데 너무 많아서, 다시 되새기고 싶은 인상 깊었던 부분만 기록해두려고 한다.


그런데 설사 터미네이터를 막고 일자리는 지키더라도 어떤 인간적 가치들은 그 과정에서 틀림없이 부서질 것이다. 사실 그런 인간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그리 대단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파괴가 일어난 뒤에야 그 가치들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게 창의성이든 문학성이든 뭐든 간에, 그걸 인간만 가질 수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알파고가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그건 불가능할 거야’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불가능한 것은 매우 적다.

앞부분에서 가장 공감되면서도 무서운 문단이었다. 요즘 LLM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그리 대단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인간적 가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한다.

“옛날 기보들을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입력하기도 해요. 기사들이 피를 토하면서 처절하게 뒀다는 전설의 대국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피를 토하면서 발견했다는 신수[이전에는 잘 두어지지 않았지만 검토 결과 좋다고 검증된 수]를 인공지능에 넣었더니 이길 확률이 5퍼센트 떨어지는 수였고 그렇더라고요.”

“… 바둑이 싫어진 건 아니고, 바둑을 좀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뺏겨버린 느낌.”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연구하던 것과 AI가 정답을 알려주는 상태에서 연구하는 건 다르죠.”

긍지와 관련된 문제다. 사람은 의미 있는 일을 자신이 잘해내고 있다고 믿을 때 긍지를 얻는다. 나는 다른 직업에서도 인공지능으로 인해 긍지를 잃을 사람이 많아지지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서 어떤 일의 의미와 인간의 유능함을 납작하게 짓눌러 버릴 것이다.

급격한 발전은 혼란을 낳는다. 정확한 정의를 할 순 없지만 인간적인 가치라는 것을 건드릴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과거 산업혁명 때 장인들이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킨 심정을 알 것 같다. 그때를 물리적 노동의 산업혁명이라고 본다면 지금은 지적 노동의 산업혁명의 문턱에 있지 않을까?

“… 초기에는 AI와 대국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는 AI의 수를 제 생각과 계속 비교하는 공부법을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기사들도 대개 그 방법으로 공부하는 것 같고, AI와 대국하는 기사도 조금 있는 거 같아요.”

신진서 9단은 AI 추천수와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는 방법이 굉장히 재미가 없는 학습법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느낌이 크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엄청나게 성실한 기사다. 언론 인터뷰에서 “나보다 더 노력한 기사는 있을지 몰라도 나보다 더 힘들게 공부한 기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 제가 하루에 12시간씩 공부를 1년 정도 했는데 효과가 없었다면 그만두고 휴식도 하고 여행도 가고 그랬겠죠. 그런데 AI를 통해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AI로 실력을 연마하다 보면 100퍼센트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 신진서 9단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학습 도구로서 인공지능이 대단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같은 고민은, 실제로 그 분야에서 쓸 만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모든 분야에서 게임체인저가 된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그 분야의 규칙 자체가 바뀌며, 그때부터 해야 하는 고민은 ‘이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된다. 어쨌든 경쟁은 다른 사람과 하는 거니까.

산업혁명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인공지능은 개인의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는 인공지능과의 공부를 통해 더 성장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다면 활용해야 한다.

나는 다른 업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한다. 인공지능과 같은 강력한 신기술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흔든다. 만약 그것이 기득권의 힘을 약화시키고 주변부에 있던 그룹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 새로운 기술은 적어도 특정 집단으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인쇄술은 성서 해석을 독점하던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켰고, 지식인 집단의 규모와 힘을 키우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지식인 중에서 인쇄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뉴스를 독점하던 종이 신문과 지상파 방송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인터넷 언론과 ‘대안 매체’ 종사자들, 블로거들은 그런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나한테도 비슷한 생각이 스쳐지났던 적이 있다. 인터넷과 유튜브가 수많은 학습자료의 권력을 무너뜨렸지만 그건 일방향이었다. LLM은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다. 원하는 주제의 키워드만 적절히 입력한다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사실 키워드를 정확하게 몰라도, 두루뭉실하게 근접한 설명을 하기만 해도, 얼추 맞는 키워드를 유추하기까지 한다. 전에 없던 강력한 도구다.

‘인공지능은 그저 도구일 뿐이며, 사용 여부는 각자 선택하면 되고, 사용하건 사용하지 않건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나가면 된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본다. 그들의 순진한 전망은 틀렸다.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변하고 뒤바뀐다. 나를 둘러싼 기술-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더불어 살아가는 한 그 영향을 받는다.

알파고 이전 바둑 팬들은 일류 기사들의 대국을 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수가 나오면 존경심을 품고 ‘저 기사는 왜 저 자리에 돌을 둔 걸까’하며 고심했다. 이제는 AI 추천수와 비교하며 ‘저 양반은 꼭 중반에 저런 실수를 잘 하더라’하고 품평한다.

참 뭐랄까… 서글프면서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싶다. 그저 적응하는 단계일까. 아니면 정말로 우리가 지키던 소중한 무언가가 부서지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암묵지는 많은 인간 전문가에게 단순히 그들이 보유한 지식 상품이 아니라, 자기효능감과 자부심, 자존김의 근원이기도 하다. … 그런데 딥러닝 기법을 사용하는 인공지능은 인간 전문가들보다 더 풍성하고 정확한 암묵지를 지니게 될지 모른다.

암묵지. LLM의 그 방대한 학습량을 이렇게 적절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2013년 ‘불쉿 작업(bullshit job)’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몇 년 뒤에 그 개념으로 책을 썼다. 그레이버는 현대 사회에는 통째로 사라져도 세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직업, 종사자들조차 속으로는 쓸모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불쉿 작업’이 많다고 주장한다. … 보수와 처우가 괜찮고 노동 강도가 높지 않은데도 의미가 없는 일이라면 불쉿 작업이다. … 전체 일자리의 40 퍼센트에 육박하며 현대 사회의 몇 가지 구조적 원인 때문에 점점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공허의 시대가 오면 오히려 육체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의 가치가 높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AI가 발전하면서 지식노동과 예술업계를 잡아 먹으며 오히려 기존에 빠르게 대체될 거라고 예상했던 블루칼라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으니. 지적 노동은 AI와 소수의 선택된 인간만이 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몸을 쓰는 일을 하는 그런 날이 오려나? 아니면 이것도 그저 한 인간의 선형적인 가벼운 예상에 불과하려나?

“저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어떤 일에서 당대 최고가 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제가 항상 최첨단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기계가 더 잘한다고 해서 왜 인간이 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떤 일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 그 일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바뀌며, 그 일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도 바뀔 것 같다. 재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묘하게도 이 논의를 오래 할수록 우리가 인공지능만큼이나 재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된다. 대체 재미라는 게 뭘까? 무엇이 재미있는 것이고, 재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엇일까?

“…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실수하는 모습을 좋아하거든요. 완벽하게 두는 바둑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바둑을 좋아하는 거죠.”

사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서사와 그들의 작품을 엄격하게 분리하지는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의 비극적인 삶은 그가 그린 유화에 비장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청각장애와 제9번 교황곡의 장엄함도 한 덩어리다. 반대로 뛰어난 예술가가 나치에 부역했다든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 그의 작품도 매력을 잃는다.

읽으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이런 생각을 매끄럽게 풀어내는 것이 바로 좋은 책의 매력인 것 같다. 지금도 우리의 육체보다 훨씬 더 기계가 잘하는 게 많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운동을 한다. 그렇지만 과거만큼의 파급력은 적겠지. 그리고 스토리. 꽤 지난 일이지만 즐겨 듣던 가수가 정말 실망스러운 일을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의 노래와 가삿말에 매력을 잃어버렸고 더 이상 그 가수의 노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참 감성적이다. 이야기는 중요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사적인 얘기는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이기도 하다. … 그런 때 인공지능이 팔 수 없는 걸 내가 팔 수 있다면 든든하리라. 그리고 내 머리에는 나만이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내 사생활’이라는 답이 떠오른다. … AI 시대에 예술가들은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잘 만드는 기술과 그 자신을 교묘하게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놀란 부분이다. 내가 “내 사생활”이라는 상품을 팔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가진 사람은 외로움을 통해 성장하고 건강해진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지닌 사람은 보다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삶을 살지 못한다. 사실 좋은 삶을 살려면 어느 정도의 외로움이 꼭 필요하다. 하루 24시간 내내 수백 명과 화상통화를 하는 사람은 좋은 삶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있는 사람만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다. 우리는 그 힘을 배워야 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통신 기술은 외로움을 견디는 바로 그 힘과 다른 사람과 건강하게 연결되는 그 방식 자체를 훼손하고 왜곡한다. 통신 기술은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변질시켰다. 외로움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외로움은 이제 탁하고 막연하게 편재하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는 그윽하고 감미로운 고독을 잃어버렸다.

나 스스로는 외로움을 잘 견딘다기보다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게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라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내가 이겨내려고 하는 순간 외로움에 지는 것 같다. 적당히 받아들이고 내려놓는 것도 필요하다. 언어의 한계로 잘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아들이 이런 건강한 힘을 기르며 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떤 식으로 경험하게 해줘야 할지 고민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헛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세계뿐 아니라 정신세계 깊은 곳까지 힘을 미치는 강력한 권력이다. … 기술은 하나의 사상이다.

이건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이었는데, 강대국들이 AI 발전을 이끌어나가는 지금은 이 권력의 무게가 남다르다고 느꼈다. 과연 이 세상이 어찌될지.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바둑계에서 어떤 정답이나 혹은 정답의 실마리를 찾아냈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은총알은 없었고, 대부분이 혼란한 가운데 중심을 잘 지켜낸 지혜로운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더이상 AI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어보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