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영국에 와서 지낸지 이제 8개월 차가 되어 간다. 이렇게 오랜 기간 한국을 떠나서 지내는 게 처음이라, 그것도 가족들이랑 다 같이 오게 되어 많이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적응한 것 같다. 느린 행정 처리, 눈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해주는 사람들, 보행자 > 자전거 > 차량의 우선순위, 모든 커피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우유 등등, 크고 작은 부분들이 이제는 꽤 자연스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부분들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의외였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영어다. 영어가 쉽다거나 어렵다거나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나오기 전에 예상했던 그림과 많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영어를 꽤 잘했다. 아니, 영어 “성적”이 좋았다고 해야 맞겠다. 학창시절부터 영어 공부에 딱히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아도 늘 성적이 좋았다. 특히 영어 듣기 성적이 좋았는데, 대부분의 시험에서 듣기는 거의 만점을 받아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업무에서 문서를 읽는 일이 많았고, 유튜브를 통해 원어민의 기술 관련 세미나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읽기와 듣기는 걱정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인 답게 말하기와 쓰기를 걱정했었다.
그런데 막상 영국에 와서 살아보니 성적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영어의 문제를 몸으로 겪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쓰기는 예상한대로 어려웠다. 그런데 어려운 이유가 내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걱정되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싸가지 없게 표현하진 않았는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말이 떠돌던데 그건 거짓말이다. 다만 우리나라와 같은 문법적인 구분이 없을 뿐이다. 영어에서 예의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은 우회적으로 돌려돌려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업무를 전달하더라도 “You must do it” 과 같은 직설적인 표현은 굉장히 무례하게 받아들여 진다. 되도록 주어가 “You”가 되지 않도록 표현하고, You를 쓴다면 항상 “Could you please”와 같은 버퍼를 잔뜩 붙여서 표현해야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 AI의 도움을 엄청나게 받고 있다. 새삼 기술의 발달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읽기와 말하기는 의외로 괜찮았다. 읽는 거야 원래도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의외로 현지 친구들도 문법을 틀리거나 오타를 내는 일이 많아서 약간의 적응이 필요하긴 했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이니까 금세 적응했다. 말하기도 마찬가지로 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 집중하면 잘 되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영어 스피킹을 할 때 억양, 이른바 인토네이션 없이 그냥 한 음으로 쭈욱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억양에 강조를 주면 훨씬 더 잘 전달되는 것 같았다. 사실 여기 친구들이 착해서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키워드 부스러기를 긁어모아서 잘 알아들어 주려는 느낌도 있다. 결정적으로 내가 아주 포멀하게 말할 일은 없어서 캐쥬얼한 대화에서의 스피킹은 꽤 괜찮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듣기였다. 듣기가 정말 안된다. 이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 한국의 주된 영어 교육은 미국식 영어 위주이다. 따라서 듣기도 미국식 발음과 인토네이션 위주이다. 여기에 익숙해진 나는 (심지어 성적도 잘 나왔으니) 내가 듣기를 잘 한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영국식 영어는…. 억양부터 단어까지 꽤 많이 달라서 정말로 적응이 필요하다.
- 영어는 세계 공용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기 나와서 체감했다. 말 그대로 세계 공용어다. 온갖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영어를 쓴다. 그리고 영국은 정말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흔히 아는 미국식 영어를 겪을 일은 정말 드물다. 인도, 프랑스, 포르투갈, 남아공, 독일 등등 다양한 나라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제 나라의 억양을 베이스로 영어를 구사한다. 안그래도 미국식 영어에만 익숙해져 있는 내 귀가, 영국식 영어도 모자라 온갖 영어 방언(?)을 듣고 이해하려다 보니 처음에는 진짜 머리가 하얘지기도 했었다. 그나마 지금은 몇몇 억양에 적응한 수준이지만, 그들의 메시지를 100% 이해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 여기서는 의외로 전화를 해야할 일이 많다. 대부분의 예약이 앱보다는 전화로 이루어지고, 집 수리, 클레임, 공지 같은 것들이 전화를 통해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말로 안들린다. 안그래도 다양한 영어 방언이 섞여 있는데 이걸 노이즈 잔뜩 낀 전화로 들으려니 매번 통화할 때마다 진땀 빼기 일쑤다. 심지어 영국은 대체로 통화 품질이 좋지 못하다… 카드사에서 중요한 일로 전화왔는데, 익숙한 억양이 아닌데다, 서로의 통신사 이슈로 노이즈까지 끼어들면, 별 것 아닌 내용이라도 한번 더 말해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요즘엔 차라리 “잘 안들려서 그런데 메일로 알려달라”고 하는 편이다.
- 여기 친구들도 내가 영어를 잘 못알아듣는 것 같으면 천천히 말해주는 편이다. 그런데 얘가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없구나 싶으면 그때부터는 자비없는 속도로 달려버린다.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되긴 하지만 너무 자주 그러면 뭔가 대화의 맥이 끊기는 것 같고 그래서, 그냥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신기한 건 그렇게 우다다다 말하는 중에는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다가 한 1-2초 쯤 지나서 뒤늦게 무슨 말을 한건지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처리 능력에 랙이 걸리긴 했지만 어찌저찌 진행은 되는 그런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잘 하던, 아니 성적이 좋았던 영어 듣기에 어려움을 겪을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안들리면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키워드에 집중해서 부스러기를 모아서 무슨 메시지를 말하고 싶은 건지 주워듣고, 몇 가지 자주 쓰이는 표현에 익숙해지고 나니, 지금은 한 60-70% 정도는 한번에 알아듣는 것 같다. 사실 이것도 정확한 근사치라고 보긴 어렵긴 하지만, 90을 예상하고 와서 10을 겪다가 이제야 겨우 60까지 올라온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AI가 발전해서 언젠가는 이런 언어의 장벽들을 다 허물어 줄지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는 최대한 많이 적응하고 또 적응해보는 수 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