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caml-shaving
영국 생활 한달 소회
2024-10-20
이제 영국에서 생활한 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들뜬 기분은 금새 가라앉았고 점차 여기서의 삶에 적응하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그레이터 런던의 남서쪽 Esher(이셔)라는 곳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판교 정도의 느낌이라고 생각된다. 회사는 히스로 공항 아래 쪽인 Staines-upon-Thames(이렇게 -upon-Thames 가 붙는 지명이 꽤 있어서 주로 앞부분만 떼서 ‘스테인즈’라고 부름)에 있는데, 적당히 쇼핑몰과 오피스가 몰려 있는 복합 단지같은 느낌이다. 한달간 살아보면서 한국과는 다르다고 느낀 점들을 틈틈이 메모해뒀는데 이게 꽤 쌓여서 한번 글로 묶어보았다.
- 사람들이 친절하다. 그렇지만 미국(특히 샌프란시스코 쪽)처럼 막 엄청나게 웃으면서 “How are you~~~” 하지는 않고, 적당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양보하는 적당한 친절이라서 나같은 사람에게는 좋다.
- 도로가 좁고 주로 왕복 2차선이다. 거기다 주차를 막 해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좁은 도로에 주차 라인이 다 그려져 있다. 처음 운전 연수 받을 때 강사가 계속 “Read the road”, “Share the road”를 강조한 이유를 몸소 느끼고 있다. 거기다 이 좁은 도로를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같이 달려야 하다 보니 더 좁게 느껴진다. 1차선 도로에서 주행방향의 왼쪽은 자전거, 오른쪽은 오토바이가 달리도록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강사에게 들음)고 하는데, 안그래도 좁은 도로를 얘네들과 같이 달리다보니 초반에 운전할 때 힘들었다. 자전거는 그냥 기다리다가 도로가 좀 넓어지거나 우회전 차선 나오면 그때 앞지르는 수 밖에 없다. 오토바이는 한국과 비슷하게 지들이 알아서 엄청나게 칼치기를 하면서 간다.
- 운전자들의 시민 의식이 한국과는 비교도 안되게 좋다. 경적 소리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고, 운전할 때 깜빡이를 켜면 진짜로 양보해준다. 깜빡이를 켜면 뒷 차가 악셀을 밟고 속도를 높이거나, 혹은 (한국의 택시처럼) 일단 끼어들고 나서 세레모니로 깜빡이를 켜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이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꽤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 심지어는 이런 경험도 있었다. 회사에 처음 출근하는 날, 정지선에서 좀 떨어진 채로 우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가 정지선에 가까이 붙어야 근처 센서가 차를 인식해서 신호가 바뀌는 시스템이 적용된 곳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걸 몰랐고, 다른 직진 신호를 세번 쯤 보내면서 대체 내 신호는 언제 바뀌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 뒷뒷차에서 한 할아버지가 내려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창문을 두드리고는 “여기 센서로 동작하는 신호니까 좀더 앞으로 가서 기다리면 켜질거야” 하고 알려주더니 쿨하게 자기 차로 돌아갔다. 한국이었으면 아마 뒷차부터 시작해서 경적 소리로 사중주를 연주 했을텐데, 과연 신사의 나라 다운 경험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 물가는 비싼데 우려했던 만큼은 아니다. 한국 물가가 참 많이 올랐다는 생각이 든다. 과일 값은 특히 싸다. 납작 복숭아와 무화과를 실컷 먹을 수 있다. 복숭아는 시즌 아웃이라 이제 못먹긴 하지만.
- 생각보다 주차비가 싸다. 내가 있는 곳이 센트럴 런던이 아니라서 그런가? 시간 당 1-2파운드 정도 밖에 하지 않고 밤과 주말에는 주차비가 무료인 곳도 많아서 놀랬다.
- 날씨는 생각보다 괜찮다. 나와 아들은 원체 열이 많은 체질이라 선선한 영국의 날씨가 마음에 든다. 비는 자주 오긴 하지만 미스트 뿌리는 것처럼 오는게 대부분이라 런던 예절에 맞춰 우산을 쓰지 않고 있다.
- 공기는 맑은데 입국하고 한참을 잔기침에 시달렸다. 알고보니 여기는 비염과 알러지의 나라라서 약국에서 Hay Fever 약과 기침약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도 몇 개 집어 먹었는데 큰 효과는 없었다.
- 키는 피트+인치, 몸무게는 스톤+파운드, 거리는 마일을 쓴다. 그래서 자동차 속도계도 mph(mile per hour)다. 그런데 주유소 기름 단위는 리터다. 대체 뭐 때문에?
- 화장실이 정말 별로다. 그리고 좁다. 비데가 없다. 비데가 그립다. 한국 롯데타워의 깨끗한 공중 화장실이 그립다…
- IT 강국이다. 웬만한 가게는 다 홈페이지를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나모 웹에디터 시절의 구린 디자인이 아니라 정말 깔끔한 디자인에 웹 표준도 잘 지켜서 https 접속도 잘 되는 그런 홈페이지가 대부분이다. 진짜 “홈페이지”의 역할을 하는 느낌이다. 근데 막상 또 대부분의 업무는 전화를 통해 진행해야 하는 게 많다. 대체 뭐지? 그리고 정부 홈페이지도 정말 잘 되어 있다. 웬만한 필요한 정보는 다 정부 홈페이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다. 부럽다.
- Monzo와 Revolut이라는 유럽의 토스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뱅킹 앱이 있다. 나는 Revolut을 쓰고 있는데, 기대치 않았는데 정말 잘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랬다. 계좌 관리, 송금, 채팅, 광고, 통계 등등 필요한 기능이 깔끔하고 빠릿하게 잘 구현되어 있고 디자인도 예뻐서 미학적으로나 성능적으로나 만족하며 쓰고 있다. 오히려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가 Revolut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 반면 보수적인 부분도 많이 남아있다. 돈을 받은 내역 뿐만 아니라 송금 내역도 서류로 달라고 한다. 심지어는 Revolut 계좌로 돈을 송금했더니 “This does not appear to be from a bank I am familiar with” 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답장을 받은 적도 있었다.
- EU의 개인정보보호 정책 때문인지, 모든 사이트에서 다 쿠키 동의해달라는 팝업이 뜬다. 정말로 말 그대로 “모든” 사이트에서 다 뜬다. 심지어는 한국 사이트에서도 뜬다.
- 과속 카메라가 차량의 앞을 찍는게 아니라 뒤를 찍는다. 그래서 과속 카메라 구간에 진입하면 카메라 구간에서 벗어나 멀어질 때까지 조심하게 된다. 이게 더 좋을지도?
- 공권력이 쎄다. 운전하다가 싸이렌 소리 들리면 길가의 모든 차량이 다 멈추고 길을 비켜준다.
- 모든 커피에 기본으로 우유를 넣을지를 물어본다. 과연 밀크티의 나라. 한국인의 핏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흐른다면 영국인에겐 Flat White가 흐른다. 심지어 아메리카노에조차 우유를 넣기 때문에 주문할 때 꼭 “Black Americano”라고 해야 한다.
- 사립학교는 저마다의 유니폼이 다 따로 있다. 거기다 규정도 세세해서 양말 색깔까지 지정한다. 그래서 유니폼 장사가 아주 잘 되는 듯 하다. Alleycatz라는 학교 교복만 파는 가게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개강 시즌이 되면 물건이 없다. 그런데 품질은 진짜 별로다.
- 공산품이 비싸다. 전자제품, 의류, 자동차, 이런 것들이 물가를 감안해도 꽤 비싸다. 인건비가 비싸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중고 시장이 활발하다. 웬만한 Charity는 다 중고 샵을 운영하고 있고, 학교 유니폼도 공식 Second Hand 세일을 자주 한다. 자동차 브랜드들도 Approved Used Car라는 이름으로 공인 중고차 판매를 운영한다.
- 당연하지만 바닥 난방은 없다. 50년 100년 된 집들이 많아서 라디에이터 난방이 많다. 그나마 최근에 지어진 Flat에는 바닥 난방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비싸다.
- 모바일 번호가 없는 한국인은 한국인이 아니듯이, 집 주소(정확히는 집의 우편번호인 Post Code)가 없는 영국인은 영국인이 아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Post Code를 요구한다. 심지어 집 주소가 굳이 필요 없어 보이는 곳(예: 상품 입고 알림)에서마저도 Post Code를 요구한다! 그래서 한번 이사하면 가입한 모든 곳에 Post Code를 업데이트 해야 해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Post Code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지는 게 많은데 예를 들어 차량 보험의 경우 사는 주소에 따라서 가격이 꽤 차이 난다.
- 굉장한 신뢰 기반 사회라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라면 “이거 이러다 큰일 나는거 아닌가?”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 주유소에서는 결제를 먼저 하지 않는다. 주유소에는 반드시 편의점이 있고 각 주유 칸(Bay)에는 번호가 적혀 있다. 일단 비어있는 Bay에서 원하는 만큼 직접 기름을 넣고 편의점 계산대로 걸어가서 몇 번 Bay인지 알려주면 그 금액만큼 결제하는 시스템이다. 기름만 넣고 도망가기 엄청 쉬워보이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차량 보험을 가입할 때, 본인의 운전 이력과 무사고 이력에 따라서 보험료가 할인이 된다. 그런데 관련 서류 증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건 아직 내가 보험에 가입한지 한달이 채 안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 Junction(우리나라로 치면 교차로인데, 여기서는 기본 1-2차선이라 크지 않다)에 신호가 없는 곳이 많다. 심지어 한 차선을 뛰어 넘은 우회전을 해야하는 경우에도 신호가 없다. 이게 동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운전자 상호 간에 신뢰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여기서는 제한 속도가 20마일이면 진짜 20마일 언저리에서 달리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오는 차의 속도가 가까워질 때까지 유지된다는 강한 가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라면 내 경험 상, 깜빡이 켜는 순간 다가오는 차가 속도를 높일 것 같다…
- 악명높은 Roundabout도 마찬가지. 진입하는 모든 차들이 일정 속도를 잘 지키고, 정해진 진입 규칙을 잘 지킨다는 가정이 없다면 굴러갈 수 없어 보인다.
- 이런 신뢰에 반해 말도 안되는 시민의식이 엿보이는 부분도 있다.
- 길빵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나마 실내는 금연인 것 같은데 실외는 그냥 다 흡연 구역이다. 카페 건물 밖에 있는 테이블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담배 한모금 하고 있는 영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자주 볼 수 있다.
- 다들 무단횡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처음엔 무단횡단이 불법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한다. 횡단보도가 많지 않고, 있더라도 버튼 식이라서 눌러서 기다려야 하고, 어차피 차선이 왕복 2차선인 곳이 많아서 그런지, 적당히 차가 안온다 싶으면 다들 그냥 건넌다. 심지어 경찰이 있는데도 무단횡단을 한다. 경찰도 신경 안쓴다.
- 템즈 강은 스펠링이 Thames 인데 발음 기호는 [temz]라서 th 발음 없는 ‘템’즈 강이라고 읽어야 한다. 대체 왜? 비슷하게 이상한 발음으로는 Southwark(서덕)과 Fulham(풀럼), Greenwichi(그리’니’치) 등이 있다. 지 멋대로다.
- 지하 주차장이 없어서 거의 모든 가구가 집 앞마당이나 집 근처 도로에 그어진 주차 구역에 주차한다. 여기에 영국 날씨가 겹쳐지니 깨끗한 차가 거의 없다. 애초에 아무도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휠도 자주 녹슬어서 멈출 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난다.
- 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영국 도로에는 알파벳+번호 형식의 이름이 붙는데, M은 Motor Way(고속도로) 이고 나머지 도로는 A, B, C, D 순으로 알파벳이 붙으며 A Road, B Road 이렇게 부른다. 주로 M과 A는 대도시와 연결되는 도로라서 정부에서 관리하고 거기에 추가로 좀더 중요하게 관리되는 도로는 한 자릿수 번호를 갖는다. 그래서 그나마 M25, A3 같은 도로는 상태가 괜찮다. Council에서 관리하는 B376 같은 도로로 가면 길도 좁고 일주일 째 방치된 로드킬도 있고 그런다. 심지어 2차선으로 잘 가다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1차선으로 합쳐지기도 하고, 분명 왕복 2차선이 가능한 넓이였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왕복 1차선 만큼 좁아져서 건너 편에 오는 차를 기다려야 하는 도로도 있다.
- 간식의 종류가 별로 없다. 달콤한 간식은 거의 다 초콜렛이고 짠 간식은 거의 다 감자칩과 감자칩의 바리에이션이다. 한국의 다채로운 과자가 그립다. 아쉬운대로 H 마트에서 후레시베리를 사먹고 있다.
- 공사를 정말 많이 한다. 나라 전체가 양재대로다. 그러고보니 양재대로 공사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아직 한달밖에 안되었지만 신기한 점이 많았다. 오히려 한달밖에 안되어서 이렇게 많이 기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1년 10개월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동안 어떤 감상을 갖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