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는 2025년
태그: life
원래 이런 회고스러운 글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올해는 원체 다사다난했던 터라… 모든 걸 다 적을 순 없지만 그래도 기록을 위해 남겨본다.
영국 생활
벌써 영국에 온지 만 1년 4개월 정도가 되었다.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일이 있었지만 아무튼 잘 해결되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
가족들도 잘 적응한 편이다. 특히 아들은 좀더 신체 활동을 즐기게 되어서 기쁘다. 영국에 오게 되었을 때 사실 영어보다는 내심 아들이 운동이나 스포츠에 재미를 붙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운동 신경이 있는 편이지만 학창시절 운동을 하지 못해서 이 모양이 된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고, 와이프는 와이프 나름대로 본인의 운동 신경을 높게 평가하지만 증거가 없던 터였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의 아들은 신체 활동을 꺼려하고 뒹굴거리는 걸 좋아해서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에 오니 과연 축구에 미친 나라 답게 학교 친구, 공원에서 만난 친구, 캠프에서 만난 친구 할 거 없이 모두가 풋볼로 대동단결되는 모습이라 아들도 덩달아 같이 축구를 엄청 좋아하게 되었다. 거기다 내 콩깍지일 수 있겠지만 곧잘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아들 바보가 되는가 보다.
심지어 나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생활이 꽤나 마음에 든다.
- 우중충하지만 꽤나 일관된 날씨. 겨울엔 많이 흐리긴 하지만 한국처럼 다이나믹하게 덥고 춥진 않아서 나에게는 꽤 쾌적한 날씨다. 그리고 난 비오는 날씨가 좋다. 다만 여름에 해가 너무 긴 것은 아직 좀 버겁다. 겨울에 해가 짧은 건 오히려 적응하니 괜찮은 편이다.
- 사람들. 그동안 영국 국내와 유럽 여기저기 유명한 곳을 꽤나 싸돌아다녔는데, 그때마다 내린 결론은 영국 사람들 정도면 정말 양반이라는 것이다. 왜 영국이 스스로의 문화와 에티켓(예: queuing)을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적당한 거리감으로 반겨주는 이웃들도 좋다.
- 예측 가능한 시스템. 물론 한국의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좀 (때로는 많이) 느린 행정 처리 속도를 제외하면 나름의 질서와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크게 스트레스가 없는 편이다. 물론 운 나쁘게 여러가지가 겹치면 (예: 연휴에 당장 써야만 하는 무언가가 박살이 났다던지) 좀 짜증나겠지만, 미리미리 대비를 해두면 된다. 속도보다는 “언젠가 되긴 한다”는 예측 가능한 사실이 좀더 중요한 것 같다.
- 남서부 런던에서의 한적한 삶. 사람들이 생각하는 “런던”의 호화롭고 도회적인 삶은 센트럴 런던의 모습이다. 반면 내가 지내고 있는 남서부 런던은 그린벨트의 원산지 답게 그린벨트로 묶인 곳이 많아서 대자연이 어우러져있다. 그래서 조용하고 고즈넉하게 지내는데 좀 심심하긴 해도 이게 참 좋다. 무엇보다 지근거리에 잔디가 잔뜩 깔린 공원이 많아서 축구공 하나 들고 아들이랑 놀아주러 가기 좋다.
- 청교도적인 분위기. 역시 청교도의 원산지라 그런지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사람들의 삶에서 청교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학교에서 생각보다 다양한 걸 가르치고, 개인주의적인 듯 하면서도 생각보다 공동체 의식이 느껴지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묻고, 꽤나 금욕적인 부분도 있고. 뭐라고 콕 집어서 설명하긴 어려운데 그동안 어렴풋하게 책으로만 접하던 것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직접 체험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 특유의 풍자적인 유머 (Sarcasm). 진짜로 일상에서 좀 비꼬듯이 유머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취향에 맞다면 소소한 일상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 아이에 대한 배려. 어느 곳을 가든 아이를 위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식당에는 키즈 메뉴와 더불어 항상 색칠 공부가 마련되어 있다. 아이와 같이 가면 패스트 트랙으로 해주는 곳이 많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크게 떠들고 울어도 사람들은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고 그들의 부모는 아이를 훈육한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도 많다. 예를 들면 비싼데 맛 없기까지 한 음식이나, 비싼데 품질도 별로인 공산품이나, 비싼데 느린 프라이빗 서비스같은 것들. 하지만 직접 나와서 살아보기 전에 걱정했던 것만큼 살지 못할 곳은 아니다. 오래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
취미 작업
올해 취미로 하고 싶었던 코딩 작업을 많이 하지 못해서 아쉽다. 특히 OCaml을 이용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는데 이 “무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올해 중순 즈음에 갑작스레 떠올라서 호기롭게 시작은 했지만 초반부터 너무 거대한 그림을 그려버려서인지 갈팡질팡 하고 있다. 요구사항을 적절히 쪼개서 작게 굴려봐야겠다.
반면 올해는 글을 많이 썼다. Org-roam 기반의 Brain Dump에 쌓인 노드가 이제 787개나 되는데, 그 중 632개를 올해 작성했다. 이건 공부도 할 겸 대부분 영어로 썼는데 평균적으로 약 1,000 단어의 글을 작성했다. 신기하게도 잘 쓴 글을 따라 쓰는 행위 자체가 명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아직 그래프의 연결이 강하진 않아서 내년에는 쓴 노드들을 읽으면서 연결하는 것도 같이 해야겠다.
엔지니어링 관련 주제들을 정리하는 글을 쓰다가 우연찮게 시리즈물 비슷하게 된 이야기 (?) 작업은 꽤 마음에 든다. 구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후로 중국, 싱가폴, 한국에서의 유입이 늘었다. 별 것 아닌 내 글을 찾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근데 이거 내가 만족할 만큼 주제를 이해하고 내가 만족할 만큼 재밌는 글을 쓰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정리하고 싶은 토픽이 잔뜩 쌓여있어서 당분간은 계속 되지 않을까 싶다. 원래도 연말까지 쓰려고 준비 중인 주제가 두 개는 더 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안난다. 아무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통계
2년 전에 한번 글 통계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생각나서 올해에도 해보았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엔 전체 누적이 아니라 올해의 포스팅만 세도록 했다. 그리고 단어 수랑 글자 수가 헷갈려서 좀 찾아보니 한국어로 쓴 글은 주로 (공백을 포함한) 글자 수를 세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아서 명칭을 좀 바꾸었다.
2025년은 (이 글을 제외하면) 총 11개의 글을 썼고, 평균 7,400자, 중위값은 약 3,800자 정도의 글을 썼다. 가장 짧은 글은 1,094자 이고 가장 긴 글은 무려 31,520자를 썼다. 분명 마지막 통계를 냈을 때의 주제가 “짧은 글 쓰기”였는데 그때에 비해 평균은 3,400자, 중위값은 1,000자 정도를 더 써버린 한해였다. 아무래도 올해는 여러가지 일이 있다보니 글을 쓰는데 욕심이 나서 이것저것 자료를 준비하다보니 글이 길어진 느낌이 있다. 그래도 얼추 한 달에 글 하나는 쓴 것 같네.
월간 통계도 계산해봤다. 아예 글을 안 쓴 달이 네 달이나 되는구나.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글을 몰아서 써버렸다. 차마 여기서 말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하반기에 꽤 여유가 생긴 덕분이 크다.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역시 거창한 인사이트를 얻으려는 것은 아니고 할 수 있어서 해봤는데, 하고 보니 매 달 3,000-5,000자 분량의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제는 늘 그렇듯 뭐든 내가 이해한 것으로 해서.
다음 장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말 못할 고민이 많다. 다들 머릿 속에 고민의 소용돌이를 안고 살아 가는건가? 아니면 나만 이런건가? 뉴럴링크가 발달하면 이런 것도 통계를 낼 수 있으려나.
그래도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은 아직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큰 울림을 받았던 이동진 평론가의 삶의 태도에 대한 글이 있는데,
자연 과학에서 프랙탈이라는 게 있습니다. 프랙탈이 뭔가 하면, 나무의 작은 가지를 하나 꺾어 세워 보면 그게 큰 나무의 형태랑 같다는 거에요. 혹은 해안선에서 1센치쯤 되는 부분을 아주 크게 확대하면, 전체 해안선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부분이 전체의 형상을 반복한다는 말을 프랙탈이라고 해요. 저는 인생도 정말 프랙탈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지금 천사가 있고, 천사가 어떤 한 사람의 일생을 판가름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의 일생을 처음부터 다 보면 좋겠지만, 천사는 바쁘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게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천사는 아무 단위나 고르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게 저라고 한다면, 저의 2008년 어느 날을 고르는 겁니다. 그리고 그 24시간을 천사가 스캐닝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날 제가 누구한테 화를 낼 수도 있고, 그날따라 일을 잘 해서 상을 받았을 수도 있죠. 어찌 됐건 그 24시간을 천사가 본다면, 이걸로 그 사람의 일생을 판단할 확률이 95%는 될 것 같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성실한 사람은 아무리 재수 없는 날도 성실합니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수능 전 날이라고 할지라도 성실하지 않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이렇게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만들어지는 거지, 인생에 거대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위해 매진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제 인생 블로그에 대 문구가 있습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우리가 인생 전체를 플래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렇게 변화도 많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일 투성이인 인생에서 어떻게 해서 그나마 실패 확률을 줄일 것인가? 그것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 밖에 없다는 거죠.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점차 불확실해지는 세상 속에서 내가 지킬 수 있는 태도는 이것 뿐이다.